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리스트 (문단 편집) ==== 교류만 있거나 영향을 받은 경우 ==== * [[니콜로 파가니니]] 당대 대부분의 연주가들이 그랬듯이 리스트 또한 파가니니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겠다”라고 [[버킷리스트|다짐한 일화]]가 유명한데 리스트는 정말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이를 이룬다.]] 이렇듯 그의 영향력은 리스트 생애에 있어 매우 지대하다보니 그의 초~중기 대부분의 피아노곡들에서 공통적으로 돋보이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성격들은 파가니니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 [[엑토르 베를리오즈]] 1830년 12월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초연이 이루어졌는데, 그 전날에 지인을 통해 환상교향곡의 악보를 미리 접한 리스트가 베를리오즈에게 찾아간 것을 계기로 알고 지내게 됐다. 이 작품에 대해 청중의 반응은 상당히 엇갈렸지만 리스트는 열렬히 칭찬하고 갈채를 보냈다고. 1834년에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자비로 출판하고 자신의 연주회에서도 연주했는데, 환상교향곡의 원곡의 악보 출판이 1845년에서야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리스트가 환상교향곡을 알리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에 영향을 받아 리스트가 탄생시킨 것이 바로 교향시이다. 리스트는 파우스트라는 작품에 큰 애정을 갖고 메피스토 왈츠, 파우스트 교향곡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에게 처음으로 파우스트를 추천한 것도 베를리오즈이다. 파우스트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에게 헌정되었다. 1840년대 이후 파리에서 급속하게 지지를 잃은 베를리오즈였으나 리스트는 이후로도 베를리오즈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바이마르의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한 후에는 연주하기가 까다로운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베를리오즈는 리스트가 있는 바이마르를 여러번 방문했는데, 그 중 한번은 카롤린 공작부인과 친해질 기회를 얻었고, 1858년 카롤린의 격려로 오페라 <트로이인>을 작곡한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카롤린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1882년 리스트의 회고에 의하면 1860년에 파리에서 연주된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사이의 비평논쟁 때문에 리스트까지 베를리오즈와의 관계가 복잡해졌다고 한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스승인 [[카를 체르니]]의 스승. 리스트의 빈 데뷔콘서트에 참석한 베토벤이 그의 연주에 감동해서 무대 위로 올라와 '야 이 헝가리 소년아, 너 참 대단하구나.'라고 감탄을 연발하며 리스트의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는 일화가 유명하고 이후에 판화로까지 그려졌다. 하지만 이 일화는 리스트가 죽은 지 12년이 흐른 뒤에나 출판된 회고록에서 등장할 뿐이고 베토벤이 리스트의 콘서트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없는 데다가[* 다만 어린 리스트가 체르니와 함께 연주회 전날에 베토벤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남겨져 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베토벤의 청력은 거의 완벽하게 상실된 직후로 추정되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허나 그와 별개로 리스트 본인의 베토벤에 대한 존경은 대단했는지 그의 초기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교향곡 편곡이 대다수였으며, 베토벤의 고향인 [[본(독일)|본]]이 베토벤의 [[동상]]을 세울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란 이야기를 듣고 발 벗고 나서 자금을 모으기 위한 자선 연주회를 열거나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하는 작업을 완성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